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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시아

수메르 역사 수메르 부흥기

수메르 문명은 구티족의 침입으로 인해 100여 년 간의 암흑기를 겪었습니다. 하지만 기원전 21세기에 접어들면서 마지막 부흥기를 맞게 되는데요. 우르 왕조가 등장하여 중앙집권 체제를 확립하고, 각 분야의 획기적인 개혁을 추진한 것이 계기가 되었죠. 특히 우르남무와 그의 아들 술기가 주도한 변화는 찬란했던 수메르 문명의 마지막 불꽃이 되었습니다. 구티족을 몰아내고 100여 년 만에 다시 꽃핀 수메르 부흥기, 그 감동적인 역사의 순간들을 함께 만나보시죠.

우르 제3왕조의 수립

우르남무와 통일 사업

구티족을 물리치고 우르에 새 왕조를 세운 건 우르남무였어요. 그는 시루름의 뒤를 이어 우르 제3왕조의 창건자가 되었죠. 우르남무는 무력을 앞세워 수메르 전역의 도시국가들을 정복해 나갔어요. 그 결과 수메르는 다시 통일을 이루게 되었답니다. 정복과 회유, 동맹을 교묘히 활용한 우르남무 덕분에 100년 만에 수메르에 새 희망이 피어난 거죠.

강력한 중앙 집권 체제 확립

우르남무는 수메르 통일에 그치지 않고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도 수립했어요. 그는 도시국가의 자치권을 대폭 제한하고, 군사와 행정 권력을 왕실로 집중시켰죠. 속국 도시에는 왕실 대리인인 엔시를 파견해 감시하고 통제했어요. 이로써 수메르에는 전대미문의 절대 왕정 국가가 등장하게 된 거예요.

술기와 전성기의 개막

우르남무의 뒤를 이은 슈기는 아버지의 개혁을 더욱 발전시켰어요. 슐긴 치세에 우르 제국은 명실상부한 전성기를 구가하게 됩니다. 중앙집권과 관료제를 정비하고, 영토를 대폭 확장하는 등 제국의 위상을 높인 거죠. 특히 정복지 경영에서 슈기는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는데요. 주변국을 제후국으로 삼아 조공을 받아내는 한편, 반란을 조장해 약화시키기도 했답니다.

'왕들의 왕' 칭호

슐기는 수메르의 전통 칭호인 '왕들의 왕'을 부활시켰어요. 이는 메소포타미아의 절대 군주임을 내외에 과시하려는 의도였죠. 정복 활동으로 달아오른 자신감의 표현이기도 했어요. 이 시기 우르는 유프라테스강 상류에서 페르시안만에 이르는 광대한 제국으로 발돋움하게 됩니다.

정치 개혁과 국가 재건

관료제와 행정 조직의 정비

우르 왕조의 중앙집권은 관료제 덕분에 가능했어요. 수도 우르에는 국가 운영의 실무를 담당할 관리들이 배치되었는데요. 사르 수카르라 불리는 고위 관료들이 각 부처를 이끌며 행정을 총괄했죠. 왕실 업무를 관장하는 서기관 조직도 따로 있었어요. 이처럼 정교한 관료제는 거대 제국 통치에 큰 힘이 되었답니다.

지방 행정 조직의 체계화

지방 행정 조직도 꽤 체계적이었어요. 수메르의 주요 도시마다 엔시라 불리는 왕의 대리인이 파견되어 행정을 감독했죠. 엔시 밑에는 각종 행정 실무를 담당하는 발급 관리들이 있었고요. 한편 정복지에는 총독이 파견되어 통치를 담당했는데, 슈기는 자신의 딸들을 총독으로 임명하기도 했답니다.

법률과 사법제도의 정비

수메르의 혼란기를 거치며 법과 질서가 문란해진 상황이었죠. 이에 우르 왕들은 법률과 사법제도 정비에도 힘을 기울였어요. 특히 슐기 때는 기존의 관습법을 체계화한 성문법이 반포되기도 했답니다. 법전에는 민법, 형법, 상법 등 각종 조항이 망라되어 있었다고 하네요.

정의로운 재판관 슐기

슈기는 스스로 모범을 보이며 공정한 재판을 강조했어요. 국왕이 직접 백성의 송사를 받아 재판하는 일도 있었다고 하죠. 억울한 사연을 품은 이에겐 직접 나서서 변호해주기도 했다네요. 이런 일화를 통해 슐기는 정의로운 재판관으로서 존경받았어요.

조세 제도와 수취 체계의 확립

관료제 운영이나 군사비 지출에는 막대한 재정이 필요했겠죠. 이에 우르 왕조는 제도적으로 조세를 거두고, 왕실 소유의 땅에서 수확을 올리는 방식으로 수입을 확보했어요. 또 공물 징수나 무역 통제를 통해서도 이익을 취했고요. 이런 과정에서 토지 소유관계나 수취 체계가 법제화되고 문서로 기록되기 시작했답니다.

바빌론의 함무라비 법전에 끼친 영향

슐긴 법전은 후대 바빌로니아의 함무라비 법전에도 영향을 주었어요. 함무라비 법전의 조항 중 상당수가 슐기 법전에서 유래했다는 주장이 있을 정도죠. 수메르의 법 체계가 후대 메소포타미아 문명에 계승된 단적인 사례라 하겠네요.

토지 정책과 농업 생산력 증대

국가적 관개 시설 확충

메소포타미아의 농업은 관개에 절대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었어요. 이에 우르 왕조는 국가 차원에서 대규모 관개 시설 건설에 힘썼죠. 수로를 내고 제방을 쌓으며, 저수지와 운하를 확충한 거예요. 이는 단순히 농업 생산력 증대를 넘어, 왕실 권위의 상징이자 이데올로기적 도구이기도 했답니다.

관개 시설과 신화 만들기

관개 사업을 주도한 왕들은 스스로를 '물의 신'에 비유하곤 했어요. 가뭄과 홍수에 맞서 싸우는 영웅으로 그려지는 거죠. 실제로 슈기는 홍수 피해를 입은 지역을 시찰하고 구휼미를 내리는 등 백성의 어려움을 덜어주려 노력했다고 해요. 이는 왕이 자연의 혼돈에 맞서 질서를 구현하는 존재라는 인식을 심어주려는 것이었어요.

토지 재분배와 농민층 육성

한편 슐기는 기근을 겪은 농민들에게 종자와 소를 나눠주는 정책을 폈어요. 또 새로 정복한 땅에 백성을 이주시키기도 했죠. 백성의 생활 안정을 꾀하면서, 미개간지를 농토로 만들어 수확량을 늘리려 한 것 같아요. 국가 주도의 이런 정책은 제국에 충성하는 자영농 계층을 육성하는 효과도 있었답니다.

토지 담보 제도와 사유지 보호

슐기는 또 토지 담보 제도를 도입해 사유지를 보호하려 했어요. 가뭄이나 전쟁 등으로 곤경에 처한 농민이 토지를 담보로 곡식을 빌리면, 3년 내로 되찾을 수 있게 한 거죠. 이는 토지 겸병을 막고 자영농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였어요. 하지만 현실에선 큰 효과를 거두진 못했던 것 같네요.

양과 염소의 사육 장려

곡물 농사 외에도 목축업이 장려되었어요. 특히 양과 염소 사육이 국가적으로 권장되었는데요. 양모로 옷감을 짜고, 가죽으로 각종 생활용품을 만들기 위해서였죠. 우르 왕궁에서 1년에 수십만 마리의 양을 바치라고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을 정도랍니다.

제사장 울라마의 기록

당시 니푸르의 제사장이었던 울라마는 양 사육의 현장을 생생히 기록으로 남겼어요. 그에 따르면 국영 목장에는 4만여 두의 양 떼가 있었다고 하네요. 양치기의 수입과 지출, 일과와 휴식까지 꼼꼼히 기록해 두었죠. 목축업의 중요성을 방증하는 대목이에요.

경제 정책과 사회 안정

관영 수공업 체제의 확립

수공업 분야에서는 국가가 주도하는 관영 수공업 체제가 확립되었어요. 국가가 직접 재료를 조달하고 장인을 고용해 제품을 생산한 거죠. 군수품이나 사치품 등 국가에 필요한 물자를 안정적으로 공급하기 위해서였어요. 관영 수공업 체제 아래 장인들은 국가에 예속된 존재나 다름없었답니다.

통제 경제의 폐해

하지만 지나친 국가 통제는 경제 활력을 떨어뜨리는 결과를 낳았어요. 장인들의 창의성이 말살되고, 민간 시장이 위축된 거죠. 물가 통제로 인한 암시장 창궐 같은 부작용도 나타났고요. 관영 수공업은 제국 유지에 필요한 물자를 조달하는 데는 효과적이었지만, 경제 전반의 역동성을 떨어뜨리는 결과를 초래했던 셈이에요.

교역로 장악과 무역 통제

수메르를 지배하게 되면서 우르 왕조는 무역로도 장악하게 되었어요. 걸프만에서 지중해에 이르는 주요 교역로가 모두 제국의 영향력 아래 들어온 거죠. 우르 왕조는 이를 이용해 외국과의 교역을 통제하고 이득을 취했어요. 바빌론이나 아시리아 상인의 활동도 제한하고, 국가가 직접 나서 무역을 주도했죠.

무역 특권 계층의 등장

우르에서는 국가 특권을 받은 무역상인 집단이 성장하기도 했어요. 담무카르라 불리는 이들은 국왕의 위임을 받아 먼 곳까지 무역을 떠났죠. 담무카르는 여러 세대에 걸쳐 무역 특권을 누리며 부를 쌓았어요. 제한적이나마 민간 영역의 무역이 발달한 셈인데요. 후대 메소포타미아 무역의 원형이 되기도 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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