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메르 문명은 인류 역사상 최초로 꽃피운 도시 문명이었습니다. 기원전 3500년경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 사이의 비옥한 메소포타미아 평야에서 발흥한 이 문명은 인류에게 문자와 도시, 관개 농업이라는 선물을 안겨주었죠. 하지만 찬란했던 수메르의 역사도 영원할 순 없었습니다. 우르 제3왕조가 몰락하면서 수메르는 급격히 쇠퇴의 길로 접어들게 되는데요. 주변 민족의 침입과 기후 변화, 내부 모순의 누적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습니다. 위대한 수메르 문명은 어떻게 무너져 내렸을까요? 그 마지막 순간을 함께 지켜보도록 하겠습니다.
외세의 침입과 압박
아무르인의 이주와 침공
수메르가 쇠락의 길을 걷게 된 직접적 계기는 서쪽에서 밀려든 유목민 아무르인의 침입 때문이었어요. 기원전 2000년경부터 아라비아 사막 지역에 거주하던 아무르인들이 메소포타미아로 대거 이주하기 시작한 거죠. 그들은 강력한 군사력을 앞세워 도시를 침공하고 약탈을 일삼았어요. 당시 수메르는 기근과 혼란에 시달리고 있었기에 이 같은 침입을 효과적으로 막아내지 못했답니다.
마리와 이신 왕조의 등장
아무르인들은 곧 도시 국가를 건설하며 수메르 땅에 뿌리내리기 시작했어요. 대표적인 게 마리와 이신 왕조였죠. 기원전 19세기경 아무르인들은 유프라테스강 중류에 마리 왕국을 세웠어요. 한편 이신 왕조는 우르 동쪽의 이신 지역을 근거지로 일어났죠. 이들 왕조는 한동안 우르 제3왕조와 각축을 벌이며 수메르를 위협했답니다.
서쪽에서 밀려든 아모리인
아무르인의 뒤를 이어 등장한 것이 아모리인이에요. 기원전 18세기경 가나안 지역에서 이주해 온 이 유목민들 역시 강력한 군사력으로 무장하고 있었죠. 그들은 우선 유프라테스강 유역의 도시들을 공격하고 약탈했어요. 이어 바빌론으로 진출해 정착 생활을 시작했죠. 훗날 함무라비로 대표되는 고대 바빌로니아 왕조가 바로 이들에 의해 세워진 거랍니다.
수메르의 버팀목이었던 우르 함락
우르는 그동안 변방의 도시들이 외적에 시달릴 때면 이를 구원하곤 했어요. 하지만 결국 우르마저 아모리인의 침공을 막아내지 못했죠. 기원전 1750년경 아모리인의 공격으로 우르가 함락되면서, 수메르의 마지막 보루마저 무너지고 말았어요. 이는 곧 아카드 제국 이래 1000년 넘게 지속되어 온 수메르 도시 문명의 종말을 의미했답니다.
바빌로니아와 앗시리아의 등장
수메르가 무너진 자리에는 이내 새로운 세력이 들어섰어요. 바로 아무르인과 아모리인이 세운 바빌로니아와 앗시리아였죠. 이들 왕조는 이전의 수메르와 아카드를 계승한 강력한 제국으로 발돋움하게 됩니다. 수메르의 쇠락은 곧 메소포타미아 역사의 무대가 바빌로니아와 앗시리아로 넘어가는 서막이었던 셈이에요.
고대 페르시아 대제국에 흡수
바빌로니아와 앗시리아 역시 오랜 세월 지속되진 못했어요. 결국 이들은 새로운 강자인 페르시아 제국에 멸망하고 말죠. 페르시아의 등장으로 고대 근동 세계의 무대는 또 한 번 바뀌게 됩니다. 하지만 이때에도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축적된 문명의 유산은 페르시아에 고스란히 계승되었다고 하네요.
기후 변화와 생태계 파괴
대규모 관개의 부작용
수메르가 쇠락한 데에는 기후와 환경의 변화도 한몫했어요. 당시 메소포타미아에선 관개 농업이 광범위하게 이뤄지고 있었죠. 하지만 이는 토양에 염분을 쌓이게 만드는 부작용을 낳았어요. 농사에 적합하지 않은 토양이 늘어나면서 농업 생산력이 크게 떨어졌던 거예요. 여기에 인구는 계속 늘어 식량 부족 사태마저 겪게 됐죠.
과도한 경작과 목축의 폐해
수메르인들은 늘어나는 인구를 감당하기 위해 경작지를 대폭 늘려갔어요. 그 과정에서 삼림이 파괴되고 초지가 사라지는 일이 벌어졌죠. 목축 또한 한계 이상으로 이뤄지면서 환경에 큰 악영향을 미쳤어요. 지금으로 치면 환경 파괴와 생태계 교란이 심각해진 셈이에요.
극심한 가뭄과 기근
더욱 치명적이었던 건 극심한 가뭄이었어요. 수메르 쇠락기에 메소포타미아 지역은 전례 없는 가뭄을 겪었던 것으로 보이죠. 가뭄은 농작물 흉작으로 직결되었고, 기근은 수메르 사회를 피폐하게 만들었어요. 심각한 가뭄이 반복되면서 농경에 기반한 도시 문명은 더는 지탱하기 어려워졌던 거예요.
기후 변화에 대한 적응 실패
수메르인들은 기후 변화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어요. 가뭄이 장기화되자 관개 시설을 대폭 늘렸지만, 근본적 해법은 되지 못했죠. 염분 누적을 막기 위한 기술도 마땅치 않았고요. 한계 상황에 다다른 수메르 문명은 기후 변화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답니다.
문명과 자연의 균형 상실
수메르의 교훈은 문명과 자연의 균형이 얼마나 중요한지 일깨워줍니다. 수메르 사람들은 자연을 정복하고 이용하는 데만 몰두한 나머지, 생태계의 한계를 간과했던 것 같아요. 거기에 기후 변화라는 악재까지 겹치면서 수메르 문명은 쇠락을 피할 수 없었죠.
내부 모순의 누적
절대 왕정의 폐해
우르 왕조가 오래 가지 못한 데는 절대 왕정의 폐해도 큰 몫을 했어요. 왕은 신권과 결탁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죠. 그러다 보니 권력 남용과 부정부패가 만연했어요. 거기에 사치와 낭비까지 극심해지면서 백성들의 불만은 쌓여만 갔답니다. 전제 군주의 폭정은 왕조 쇠퇴의 싹을 키우고 있었던 셈이에요.
관료제의 비대화와 부패
우르 왕조 시절 관료제는 더욱 비대해졌죠. 통치 조직과 행정 기구가 복잡해지고 관리들의 수가 크게 늘어난 거예요. 그러다 보니 관료들이 백성을 수탈하고 부패를 저지르는 사례도 많아졌어요. 지방 토후들의 반란이 잦아진 것도 이런 배경에서였죠.
계급 간 갈등의 심화
수메르 사회는 왕족과 귀족, 평민, 노예로 엄격히 계급이 나뉘어 있었어요. 하지만 쇠락기에 접어들면서 계급 간 갈등이 한층 격화했죠. 특히 가난한 평민들의 불만이 폭발 직전까지 이르렀어요. 식량 부족에 시달리는 서민들은 노예로 전락하거나 빚쟁이 신세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으니까요.
계급 모순과 불평등의 대물림
노예 신분은 대물림되었기에 신분 상승은 불가능에 가까웠어요. 한번 노예가 되면 자손 대대로 노예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거죠. 토지는 왕실과 신전, 귀족이 대부분 소유하고 있어 부의 편중 또한 심각했답니다. 이런 불평등이 결국 수메르를 내부에서부터 좀먹게 되죠.
군사적 약화와 대외 팽창의 한계
정복 전쟁과 약탈로 유지되던 수메르 경제도 결국 한계에 봉착하고 말았어요. 강압적 수탈로 다져진 통치력은 곧 약화될 수밖에 없었죠. 게다가 군사력이 약화되면서 더 이상의 대외 팽창도 힘들어졌어요. 오히려 주변 세력의 반격을 받아 영토를 잃는 일이 벌어졌죠.
침략전쟁의 후유증
무시무시한 전쟁의 후유증도 만만치 않았을 거예요. 정복지 백성들의 저항과 반발심, 약탈로 황폐해진 토지. 게다가 전쟁 포로로 잡혀온 노예들의 반란 기도와 도주 사태. 이 모든 게 제국을 내부에서부터 좀먹어 갔죠. 폭력으로 세운 제국은 폭력으로 망해갔던 것 같아요.
수메르 문명의 유산
문자의 탄생과 기록 문화
수메르는 인류 최초로 문자를 사용한 문명이에요. 기원전 3500년경에 나타난 수메르의 쐐기문자는 인류 지성사의 여명을 알리는 신호탄이었죠. 수메르인들은 문자로 행정과 무역 기록을 남겼고, 역사와 신화, 문학작품을 기록했어요. 수메르에서 시작된 기록 문화는 훗날 인류 문명을 꽃피우는 토대가 되었답니다.
길가메시 서사시와 문학의 효시
『길가메시 서사시』는 인류 최초의 문학작품으로 꼽히죠. 영웅 길가메시의 모험과 우정, 죽음에 대한 통찰을 노래한 이 작품은 수메르 문학의 백미에요. 이는 후대 서사시 문학의 원형이 되기도 했죠. 그야말로 문학사의 효시이자 보물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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