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24세기경, 메소포타미아 북부에서는 새로운 세력이 떠오르고 있었습니다. 바로 아카드인들이죠. 유목민 출신인 그들은 수메르의 도시 국가들을 하나씩 정복해 나가더니, 마침내 최초의 중앙집권 제국을 세우고 말았습니다. 사르곤 대왕으로 대표되는 아카드 왕조의 시대, 우리는 거기서 '제국'이라는 새로운 역사의 흐름을 목격하게 됩니다. 200여 년간 메소포타미아를 지배한 아카드 제국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함께 만나보도록 하죠.
아카드 왕조의 건국
사르곤의 등장과 정복 활동
아카드 제국의 건국자는 바로 사르곤이에요. 전설에 따르면 그는 어릴 때 버려진 아기로 궁핍한 삶을 살았다고 하죠. 하지만 뛰어난 무술과 언변으로 두각을 나타내 키시 왕의 측근이 되었어요. 훗날 키시를 배반하고 독립한 사르곤은 주변 도시국가들을 잇달아 정복하며 세력을 떨쳤답니다.
제국으로 가는 길
사르곤은 군사적 재능만큼이나 정치적 수완도 뛰어났어요. 그는 정복한 도시들의 기득권 세력을 교묘히 포섭하면서 영향력을 확대해 갔죠. 기원전 2334년경, 사르곤의 군대는 우르와 우룩을 함락하고 수메르 전역을 석권하게 됩니다. 그리고 수도를 아카드로 정하고 메소포타미아 최초의 중앙집권 국가를 세우는데요. 이로써 '제국'의 시대가 막을 올린 거죠.
리무쉬의 정복과 나람 씬의 전성기
사르곤의 아들 리무쉬는 북쪽의 아시리아와 엘람을 정복 해 판도를 넓혔어요. 특히 그는 바빌론을 병합하면서 메소포타미아 통일의 기반을 놓았죠. 손자인 나람 씬 때 제국은 절정에 달하는데요. 그는 페르시아만에서 지중해에 이르는 광활한 제국을 다스리며 '4방의 왕'을 자처했답니다.
샤르칼리 사리의 치세
아카드 제국의 전성기도 그리 오래가진 못했어요. 강압적 통치에 반발한 도시국가들이 잇달아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이죠. 사르곤의 증손자인 샤르칼리사리는 제국의 위기를 수습하고자 애를 썼지만 역부족이었어요. 그의 뒤를 이은 두 왕은 이름조차 제대로 남기지 못한 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죠.
구티족의 침입과 왕조 말기의 혼란
아카드 제국의 쇠락에는 외부의 위협도 한몫했어요. 북동쪽에서 쳐들어온 유목민 구티족이 아카드를 급습해 도시를 초토화시킨 거죠. 나람 씬 때 일시적으로 격퇴되긴 했지만, 강성했던 제국의 기운은 이미 꺾이고 있었어요. 구티족과 주변국의 도전이 거세지면서 아카드의 국운은 기울어만 갔답니다.
아카드 제국의 통치 체제
절대 왕정의 수립
아카드 왕조 시기에는 강력한 중앙집권적 통치가 이뤄졌어요. 절대적 권력을 갖춘 왕이 거대한 제국을 다스리는 체제였죠. 왕은 '우주의 왕'이나 '4방의 왕' 같은 화려한 칭호를 내세우며 신적 권위를 과시했어요.
중앙 관료제와 속주 행정
아카드 제국의 수도에는 왕의 명령을 받들어 제국 전역을 관할하는 중앙 관료들이 있었어요. 재무와 군사, 사법 등을 총괄하는 관리들이죠. 한편 정복지에는 총독을 파견해 통치를 맡겼는데요. 지방에 파견된 총독들도 왕에 대한 절대 복종을 요구받았답니다.
정복지 수탈과 물자 재분배
아카드는 피정복국을 수탈하며 부를 축적했어요. 곡식이나 가축, 금속 등 각종 자원을 빼앗아 올 정도였죠. 이렇게 징발한 물자의 상당량은 왕족과 귀족, 관료, 군대에 재분배되었어요. 물론 피정복지 주민들의 삶은 피폐해졌죠.
공용어로서의 아카드어
아카드의 지배는 언어 정책에서도 드러났어요. 아카드어가 공용어로 지정되어 문서와 비문에 널리 쓰였던 거죠. 수메르어는 여전히 종교나 학문에서 명맥을 이어갔지만, 행정과 외교에서는 아카드어가 우세했답니다. 언어적 통합을 통해 제국의 지배력을 높이려 한 것이죠.
제국의 영광을 드러내는 건축물
아카드 왕들은 대규모 신전이나 궁전을 세워 제국의 위용을 과시하곤 했어요. 아카드에 세워진 '우주의 왕' 신전이 대표적인 예인데요. 잉가르 신을 모신 이 신전은 당시 메소포타미아 최대 규모를 자랑했다고 해요.
사르곤의 개선문
수도 아카드의 입구에는 사르곤의 개선문이 우뚝 서 있었어요. 정복 전쟁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문인데, 높이가 무려 40m에 달했다고 하네요. 개선문 양옆의 벽면에는 사르곤의 무훈을 찬양하는 비문이 빼곡히 새겨져 있었답니다.
아카드 문명의 유산
아카드 미술의 발전
아카드 시기에는 조각과 부조 예술이 크게 발전했어요. 특히 공예 기술이 발달해 정교한 동상이나 부조가 많이 제작되었죠. 사실적이고 입체적인 표현이 특징인데, 왕이나 신을 묘사할 때 위엄과 장중함이 잘 드러난답니다.
나람 씬 석판의 걸작
아카드 예술의 백미는 나람 씬 석판이에요. 산 정상에서 적을 무찌르는 모습의 나람 씬 왕을 묘사한 건데요. 활시위를 당기고 있는 왕의 근육질 팔이나, 그의 발밑에 뒹구는 시체들의 모습에서 강렬한 생동감이 느껴지죠. 이 작품에는 전쟁을 미화하는 당시의 시각이 잘 반영되어 있어요.
우주의 왕 서사시와 아카드 신화
아카드 시기에는 새로운 문학 작품도 많이 탄생했어요. 특히 영웅 서사시가 유행했는데, '우주의 왕' 서사시가 대표적이죠. 잉가르 신을 찬양하는 이 작품은 왕의 신성과 권위를 강조하는 내용이에요. 신들의 계보를 다룬 서사시 「에누마 엘리쉬」도 이 시기에 널리 읽혔답니다.
신들의 후견 아래 정복 전쟁을 정당화
아카드 신화는 제국의 이데올로기를 담고 있어요. 신들이 아카드의 정복 전쟁을 돕고 왕에게 권위를 부여한다는 내용이 자주 등장하죠. 정복 사업을 신의 계시로 정당화하려는 속셈이 엿보이는 대목이에요. 그만큼 신화가 제국 통치의 도구로 이용되었다는 얘기겠죠.
후대 문명에 끼친 영향
아카드 문명의 유산은 훗날 바빌로니아와 아시리아 문명으로 계승되었어요. 절대 왕정이나 중앙 집권제 같은 통치 방식이 이어진 건 물론이고, 문학이나 예술, 종교적 전통 역시 면면히 이어졌죠.
바빌로니아의 함무라비 법전
바빌로니아의 함무라비 법전에는 아카드 시대의 법률 체계가 반영되어 있어요. 잔혹한 응보형이 눈에 띄는데요.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조항이 대표적이죠. 피지배층을 강압적으로 통제하려 한 아카드의 사법 관행이 남아 있는 거예요.
아카드 제국 멸망 이후
구티족의 점령과 우르 제3왕조의 등장
기원전 2154년경, 구티족에 의해 멸망한 아카드. 메소포타미아는 다시 수많은 도시국가들로 분열되었어요. 한동안 구티족이 군림하기도 했죠. 약 100년의 암흑기를 거친 뒤 우르 제3왕조가 들어서면서 수메르 문명은 잠시 꽃을 피웠지만, 결국 바빌로니아에 의해 멸망하고 말았답니다.
수메르의 쇠퇴와 아카드 유산의 계승
아카드 제국 이후 수메르는 재통일을 이루지 못했어요. 그들의 도시 문명은 서서히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죠. 하지만 수메르의 문화적 유산은 아카드를 통해 훗날 메소포타미아 문명에 고스란히 이어졌어요. 수메르어는 여전히 학문과 종교에서 권위를 인정받았고, 수메르의 신화와 문학은 아카드어로 번역되어 널리 읽혔답니다.
아카드 제국이 남긴 역사적 의의
아카드는 최초의 중앙집권 제국이라는 점에서 세계사적 의의가 크답니다. 광활한 영토를 무력으로 정복하고 강력한 중앙 집권 체제로 다스린 패턴은 훗날 페르시아나 로마 같은 대제국들의 선례가 되었어요. 제국주의 역사의 효시인 셈이죠.
문명의 전파자로서의 역할
아카드는 수메르 문명을 널리 전파하는 데도 기여했어요. 정복 활동을 통해 수메르의 문자와 학문, 종교, 예술이 메소포타미아 전역으로 확산된 거죠. 군사적 팽창이 역설적으로 문명 교류를 촉진한 셈이에요. 수메르 문명을 계승한 아카드의 문화는 후대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뿌리가 되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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