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페르시아 역사에서 가장 찬란한 왕조를 꼽으라면 단연 사파비 왕조를 들 수 있을 거예요. 사파비 왕조는 16세기 초 이란 고원에서 일어난 부족 연맹으로,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와 시아파 이슬람을 기반으로 200여 년간 페르시아를 지배했죠. 문화와 예술이 꽃피웠던 사파비 왕조 시대, 세계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이스마일 1세와 아바스 1세 등 사파비 군주들의 이야기를 들어볼까요?
사파비 왕조의 성립
이스마일 1세와 사파비 왕조의 창건
사파비 왕조를 연 장본인은 바로 이스마일 1세였어요. 그는 시아파 수피즘을 신봉하는 사파비 교단의 후예로, 아제르바이잔 지역의 튀르크 유목민들을 규합하여 세력을 키웠죠. 이스마일은 1500년대 초 아크코윤루 왕조를 무너뜨리고 1507년 타브리즈에서 왕위에 올랐어요. 이로써 사파비 왕조가 공식 출범하게 되었죠.
시아파 이슬람의 국교화
이스마일 1세는 시아파 이슬람, 그 중에서도 12이맘파를 국교로 정했어요. 당시 이란에서는 수니파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기에 이는 상당히 획기적인 조치였죠. 이스마일은 시아파 성직자들을 등용하고 수니파를 탄압했어요. 궁극적으로 그의 정책은 오스만 제국 등 수니파 왕조에 맞서 시아파 국가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하려는 의도였다고 해요.
카스르-에 시린의 전투와 차르디란 전투
이스마일 1세는 메소포타미아와 코카서스 지역으로 영토를 넓혀갔어요. 하지만 동쪽에서는 우즈베크의 샤이바니 왕조와, 서쪽에서는 오스만 제국과의 대결이 불가피했죠. 이스마일은 1510년 카스르-에 시린 전투에서 샤이바니 왕을 꺾고 호라산과 트란스옥시아나 지방을 차지했어요. 하지만 1514년 차르디란 전투에서는 오스만의 셀림 1세에게 패하고 말죠.
차르디란의 충격과 수도 이전
사파비군이 차르디란에서 패배한 이유는 화약병기의 부재였어요. 기마병 중심이었던 사파비군으로서는 오스만군의 대포와 소총을 당해낼 재간이 없었죠. 이 전투를 계기로 사파비 조정은 수도를 타브리즈에서 크라스로 옮겼어요. 차르디란의 패배는 사파비에 큰 충격을 안겨줬지만, 이를 교훈 삼아 군사 개혁과 근대화에 매진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답니다.
사파비 왕조의 전성기
타흐마스프 1세의 치세
이스마일 1세 사후 왕위에 오른 타흐마스프 1세는 오스만과의 대결 속에서도 왕조의 기반을 공고히 했어요. 그는 수도 크라스에 궁전을 건설하고 관료제를 정비했죠. 타흐마스프는 예술을 후원하기도 했는데, 그의 시대에는 뛰어난 세밀화가들이 많이 배출되었어요.
아바스 1세의 등장
1588년 아바스 1세가 왕위에 오르면서 사파비 왕조는 최전성기를 맞게 됩니다. 그는 페르시아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군주로 평가받고 있어요. 아바스는 군사 개혁을 통해 왕립 근위대인 골람을 창설했고, 중앙 집권을 강화하는 한편 지방에는 자치권을 부여했죠. 이런 개혁 덕분에 사파비 제국의 영토는 최대로 확장되었어요.
영토 확장과 도시 건설
아바스 1세는 우즈베크와 오스만 제국을 상대로 일련의 승리를 거뒀어요. 그 결과 아제르바이잔과 바그다드, 코카서스 일대를 차지했죠. 아바스는 수도를 이스파한으로 옮기고 대규모 토목 사업을 펼쳤어요. 그의 치세에는 거대한 이맘 광장을 중심으로 화려한 모스크와 궁전들이 세워졌답니다.
경제 발전과 무역의 확대
아바스 1세는 비단길을 장악하고 무역을 장려해 경제 발전을 이끌었어요. 그는 영국 동인도회사에 통상 특권을 부여하는 등 유럽과의 교역에서도 적극적인 자세를 보였죠. 호르무즈 해협을 통한 해상 무역도 크게 활성화되었고요. 아바스 1세 치하에서 사파비 제국은 명실상부한 강대국으로 부상하게 되었습니다.
문화와 예술의 황금기
사파비 양식의 예술
사파비 시대에는 건축, 회화, 도자기, 카펫 등 미술 각 분야가 눈부신 발전을 이루었어요. 특히 이스파한에 건설된 왕립 모스크는 사파비 건축의 걸작으로 손꼽히죠. 모스크 내부의 화려한 타일 장식과 섬세한 아라베스크 무늬는 보는 이의 눈을 즐겁게 합니다.
세밀화의 발달
사파비 왕조 때 가장 주목할 만한 예술 분야는 단연 세밀화예요. 카말 앗 딘 비흐자드나 레자 아바시 같은 거장들이 등장하며 페르시아 세밀화는 황금기를 맞았죠. 사파비 세밀화는 섬세한 묘사와 화려한 색채가 특징인데, 주로 왕실의 생활이나 로맨스를 소재로 다뤘어요.
문학의 르네상스
사파비 시대에는 페르시아 문학도 크게 발전했어요. 티무르 제국 시기에 억눌렸던 페르시아 어와 문학이 다시 꽃피운 거죠. 특히 사디의 『장미의 정원』, 하피즈의 『가젤』 같은 서정시가 많은 사랑을 받았어요.
『샤나메』의 부활
페르시아의 대서사시 『샤나메』도 사파비 시대에 크게 주목받았어요. 15세기 티무르 조정에서 간행된 『샤나메』는 사파비 시대에 와서 널리 읽혔죠. 아바스 1세는 샤나메 삽화화가인 모인 모사바르를 후원하기도 했답니다. 민족 영웅서사시의 재발견은 페르시아인들의 자긍심을 고취하는 데 기여했어요.
쇠퇴와 멸망
지배체제의 동요와 위기
아바스 1세 이후 사파비 왕조는 내리막길을 걷게 됩니다. 술탄 후세인 같은 폭군이 등장하면서 정국이 혼란에 빠졌고, 경제도 크게 위축되었죠. 17세기 후반에는 오스만과의 전쟁에서도 패배를 거듭하며 영토를 잃었어요. 이런 가운데 벌어진 아프간 부족의 반란은 왕조의 멸망을 재촉하는 결정타가 되었죠.
아프간 반란과 이스파한 함락
1722년 아프간의 길자이 부족 수장 미르 마흐무드가 반란을 일으켰어요. 그는 3만 대군을 이끌고 수도 이스파한을 포위했죠. 6개월간의 항전 끝에 술탄 후세인은 항복했고, 사파비 왕조는 멸망의 길로 접어들었어요.
나디르 샤의 등장
호라산 지방의 아프샤르 부족 출신 나디르 쿨리 베그는 1729년 아프간군을 이스파한에서 몰아내고 사파비 왕자를 옹립했어요. 하지만 그는 곧 왕위를 찬탈해 나디르 샤로 즉위했죠. 이로써 사파비 왕조는 완전히 막을 내리고 아프샤르 왕조가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역사적 의의와 영향
근대 이란의 출현
사파비 왕조는 오늘날 이란이라 불리는 민족국가의 토대를 마련했어요. 시아파 이슬람을 앞세워 국가적 통합을 이룩한 게 사파비 왕조였죠. 또한 아제르바이잔, 쿠르드, 루르 같은 소수 민족을 아우른 다민족 국가로서의 성격도 사파비 시기에 확립되었답니다. 이런 의미에서 사파비 왕조는 근대 이란으로 가는 디딤돌이 되었다고 할 수 있어요.
시아파 문화의 결정체
오늘날 이란은 전 세계 시아파 무슬림의 중심으로 꼽히죠. 이 같은 시아파 문화는 사파비 왕조에서 비롯된 것이에요. 사파비 왕조는 시아파를 국교로 정하고 시아파 성직자들을 보호했어요. 그들의 노력으로 시아파 이슬람은 이란 문화의 근간으로 자리 잡게 되었죠.
동서 문화 교류의 재개
사파비 시대에는 실크로드가 다시 열리면서 동서 문화의 교류가 활발해졌어요. 아바스 1세는 유럽 각국과 통상 관계를 맺으며 문물 교류를 주도했죠. 당시 이스파한에는 동인도회사와 네덜란드 상관들이 진출했고, 카르멜회 선교사들도 들어왔다고 해요. 유럽에서는 페르시아 양식의 예술품이 크게 유행하기도 했답니다.
세계사에 남긴 흔적
사파비 왕조가 남긴 유산은 정치, 문화, 예술 등 다방면에 걸쳐 있어요. 음식으로 치자면 케밥이 바로 사파비 왕조의 산물이라는 사실, 알고 계셨나요? 아바스 1세가 쇠고기와 양고기를 꼬치에 끼워 구운 것이 오늘날 케밥의 기원이 되었다고 하네요. 지금도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는 페르시아 카펫 역시 사파비 시대에 발전한 거랍니다.
화려하면서도 강력했던 사파비 왕조. 그들은 16~18세기 서아시아의 패권을 놓고 오스만 제국, 무굴 제국과 경쟁하며 페르시아의 위상을 높였어요. 시아파 이슬람을 기치로 내건 사파비 왕조는 근대 이란의 모태가 되었죠. 개혁군주 아바스 대제의 활약상은 오늘날까지도 이란인들의 가슴속에 살아 숨 쉬고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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