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26세기경, 수메르 도시국가들 사이에서는 패권을 차지하기 위한 치열한 각축전이 벌어졌습니다. 그 와중에 메소포타미아 남동부에 위치한 작은 도시국가 라가시가 역사의 전면에 부상하게 되는데요. 에안나툼 왕을 필두로 한 야심 찬 군주들의 활약상을 바탕으로, 라가시는 잠시나마 수메르 세계를 호령하는 강국으로 군림하게 됩니다. 라가시 왕조가 남긴 업적과 유산은 무엇일까요? 함께 살펴보도록 하죠.
라가시 왕조의 흥기
메실림 왕과 라가시의 독립
라가시가 처음 역사에 모습을 드러낸 건 기원전 27세기경이었어요. 당시 라가시는 키시 왕조의 지배를 받는 속국이었죠. 그러다 기원전 2650년경 라가시의 군주 메실림이 키시로부터 독립을 쟁취하면서 라가시 왕조의 역사가 시작되었어요. 메실림은 주변 도시를 정복하고 긴급 왕의 칭호를 얻으며 세력을 넓혀갔답니다.
우루카기나 왕의 개혁과 우르 왕조의 멸망
메실림의 후계자들도 영토 확장에 힘썼는데요. 특히 우루카기나 왕은 우르를 정복하고 우르 왕조를 멸망시키는 등 대외적인 성과를 거뒀어요. 우루카기나는 한편으로 부패한 관료와 사제들의 특권을 없애고 백성의 처지를 개선하는 개혁정치를 폈는데요. 수메르 최초의 개혁군주로 평가받기도 해요.
에안나툼 왕의 대외 원정
메실림의 현손자 에안나툼은 라가시 역사상 최고의 영웅으로 꼽혀요. 에안나툼은 기원전 2450년경 즉위하자마자 무력으로 주변 도시국가들을 정복하기 시작했죠. 우선 엘람 지역을 공격해 대승을 거뒀고, 북쪽의 아카드와 마리 지역으로 진격했어요. 5년에 걸친 대외 원정으로 에안나툼은 수메르 전역을 제패하는 쾌거를 이뤘답니다.
수메르 최초의 제국 건설
에안나툼은 수메르 역사상 처음으로 광역 국가를 세웠다는 평가를 받아요. 일종의 제국을 건설한 셈이죠. 에안나툼은 정복지 다스리기 위해 속국 왕들을 임명하고 공물을 받아냈어요. 또 정복 지역에 기념비를 세워 자신의 치적을 과시하기도 했답니다. 이는 제국주의적 통치 방식의 효시이기도 해요.
라가시의 영토 확장과 번영
군사력의 강화와 정복 활동
라가시의 왕들은 강력한 군대를 양성하는 데 힘을 쏟았어요. 전차부대를 앞세워 원정을 떠나는 모습은 당시 라가시 부조에서 자주 묘사되는 장면이죠. 에안나툼 왕 이후에도 에나툼 1세, 엔테메나, 에난나툼 2세 등의 왕들이 주변 도시국가를 공격하며 영토를 넓혀갔답니다.
우르, 우룩, 니푸르 정복과 그 의미
특히 에난나툼 2세는 수메르의 종교 도시 니푸르를 정복하는 대업을 이뤄냈어요. 니푸르에 있는 왕들의 왕 신전 에쿠르를 장악함으로써, 에난나툼 2세는 명실상부한 수메르의 패권자로 군림하게 되었죠. 니푸르 함락은 라가시의 영향력이 절정에 달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에요.
우루카기나 왕의 개혁정치
한편 평화적인 치적도 눈에 띄는데요. 우루카기나 왕이 단행한 개혁정치가 바로 그거예요. 그는 물가를 안정시키고 과부와 고아를 구제하는 등 복지정책을 펼쳤죠. 또 재판이 공정하게 이뤄지도록 사법제도를 정비하고 관리들의 부정부패를 엄단했다고 해요.
최초의 법률 문서 우루카기나의 개혁 법령
우루카기나의 개혁 내용은 당시 비문으로 남아 있는데, 이게 수메르 최초의 성문법이에요. 우루카기나는 새로운 법을 만들어 신전 앞에 세워두고 널리 알렸다고 하죠. 수메르에서 법치주의가 맹아를 틔운 것도 우루카기나 덕분이랍니다.
관개 시설의 확충과 토지 개간
라가시 왕들은 또 영토 확장과 더불어 토지 개간에도 힘썼어요. 운하와 저수지를 만들어 물을 공급하고 황무지를 개간하는 사업이 활발히 벌어졌죠. 이런 노력 덕분에 라가시의 농업 생산력이 크게 늘어났고, 인구도 급증했다고 합니다.
에난나툼의 운하 건설
라가시 왕들의 관개 사업 중에선 에난나툼 왕의 업적이 두드러져요. 그는 긴급운하라 불리는 대규모 운하를 팠는데, 길이가 무려 30km에 달했다고 하네요. 관개 시설 덕분에 곡물 생산량이 크게 늘어, 에난나툼 시기 라가시의 인구는 3만 명을 넘어섰다고 해요.
라가시의 문화와 예술
수메르 문학의 발달
라가시 시대에는 수메르 문학도 크게 발전했어요. 『길가메시 서사시』의 원형이 탄생한 것도 이때라고 하죠. 라가시에서는 시 형식의 찬가도 많이 쓰였는데요. 에안나툼 왕의 공적을 기리는 「닌기르수의 화살」, 관개 사업을 찬양한 「호우 에 대한 찬가」 등이 대표적이에요.
역사서술의 맹아
당대의 사건과 왕들의 업적을 기록한 역사 문헌도 나타나기 시작했어요. 이른바 '연대기'라 불리는 문서인데요. 에난나툼 왕의 치적을 연도별로 정리한 '투머 비'가 연대기의 효시로 꼽히죠. 객관적 사실을 바탕으로 역사를 서술하려 한 시도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답니다.
조각과 부조의 예술성
라가시 시대에는 조각과 부조 예술도 크게 발전했어요. 종교 의식이나 군사적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제작된 작품들인데요. 사실적이면서도 생동감 넘치는 표현이 인상적이에요. 「수메르의 모나리자」로 불리는 여사제의 흉상은 라가시 예술의 진수를 보여준답니다.
독수리 문장의 석판
특히 에안나툼 왕의 승전을 기념해 만든 독수리 문장 석판은 단연 압권이에요. 독수리 발톱으로 원수들을 움켜쥐고 있는 모습은 전쟁의 잔혹성을 적나라하게 표현하고 있죠. 이 석판은 당시 전쟁관과 예술 표현의 관계를 잘 보여주는 걸작으로 평가받아요.
라가시 왕조의 몰락
우르 왕조의 도전
라가시의 전성기도 그리 오래가진 못했어요. 기원전 2400년경부터 남쪽의 우르 왕조가 세력을 떨치기 시작한 거죠. 에안나툼 3세 때 우르와의 대결에서 밀린 라가시는 급격히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어요. 결국 우르의 왕 우르남무에게 정복당하고 말았죠.
마지막 왕 우루이닝르수
라가시 왕조의 마지막 왕은 우루이닝르수였어요. 그는 우르로부터 독립하려 했지만 실패하고 말죠. 우르남무는 라가시를 철저히 유린했고, 신전들을 모조리 파괴했어요. 우루이닝르수 자신도 처형당했다고 하네요. 이로써 한 세대를 풍미했던 라가시 왕국은 종말을 고하게 됐답니다.
고대 제국의 흥망성쇠
라가시 왕조의 역사는 전형적인 고대 제국의 부침을 보여줘요. 에안나툼 왕 때 절정에 달했던 국운도 결국 오래가진 못했죠. 주변 도시국가들의 견제와 도전을 이겨내지 못한 거예요. 내부의 모순이 누적된 것도 몰락의 요인이 되었어요.
그래도 남은 흔적들
비록 라가시는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지만, 그 흔적은 오늘날까지 남아 있어요. 에안나툼 왕의 독수리 문장 석판이나 우루카기나 왕의 개혁 법령 같은 문화유산들 말이죠. 이런 유물들은 수메르 문명의 성취를 가늠케 하는 소중한 자료가 되고 있답니다.
라가시 왕조의 역사적 의의
제국주의와 법치주의의 효시
라가시는 최초의 광역 국가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해요. 정복 전쟁과 속국 경영이라는 제국주의적 통치 방식을 최초로 선보였던 거죠. 반면에 우루카기나의 개혁 정치는 법치주의의 효시로서 의미가 크답니다. 라가시에는 제국주의와 법치주의라는, 상반된 듯 보이는 두 흐름이 공존했던 셈이에요.
신앙과 권력의 결합이 빚은 왕조
라가시 왕조는 신권정치의 전형을 보여주기도 해요. 수호신 닌기르수에 대한 신앙에 기반한 왕권이 라가시의 버팀목이었던 거죠. 그래서 왕들은 무력으로 정복한 지역에 제단을 세우고 닌기르수상을 안치하는 일에 공을 들였어요. 신을 앞세운 정복 활동은 메소포타미아 역사에서 자주 반복되는 주제랍니다.
문화의 보고로서의 가치
무엇보다 라가시는 수메르 문명의 유산을 간직한 도시로서 큰 가치가 있어요. 연대기 문학과 역사서술의 기원, 성문법의 효시 등은 인류 문화사에 커다란 족적이 되었죠. 독수리 문장 석판이나 여사제의 두상 같은 명품들은 수메르 예술의 최고봉을 보여준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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